월간 지앤선

글, 사진 김현정 / 편집 박미정

 

3월 29일 금요일 저녁, 스파크플러스(SPARKPLUS) 선릉점에서 Facebook Developer Circle: Seoul과 Innovation Lab Korea from Facebook이 공동으로 주최한 'Women of Developer Circles: Seoul' 행사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2019년 상반기가 근래 들어 가장 바쁜 나날들이여서, 시간을 쥐어 짜내야 참여를 할 수 있었기에, 행사의 만족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작업이나 더 할 걸' 하는 생각을 가질 수 도 있을 터였다. 후기를 요약해 말하자면, 그런 생각할 새 없이 올해 들어 가장 만족스러운 행사로 손꼽는다. 각자의 어려움들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목소리와 경험담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신이 나고, 응원이 되는 시간이었다고 감히 단언해본다.

 

행사 운영에서 돋보이는 배려

 

작년 연말에 참석했던 여성 기획자 컨퍼런스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페미니즘 지향 행사인 경우, 강연 콘텐츠뿐 아니라 행사를 운영하는 방식에도 배우는 바가 많다.

 

자녀를 동반하여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원할 수 있는 부분들이 행사 기획 단계부터 검토되는 부분, 혹여 행사 참가자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실수할 수 있는 성차별적 발언이나 행동들을 방지하기 위해 행동 강령(Code of Conduct)을 사전 공유하는 부분들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다른 여타 행사들에 비해 더 좋았던 부분은 연사의 구성에서 오는 콘텐츠의 신선함도 한 몫했다. 돈을 내고 참석하는 유명 세미나나 컨퍼런스들의 연사들은 소위 ‘네임드’인 경우가 많고, 그러한 네임드의 비율은 남성이 많다. (UX/UI 이슈를 다루는 디자인 행사에 작년, 재작년쯤 한창 다니곤 했는데, 디자이너의 비율을 보자면 전체적으로는 여성 비율이 높지만, 연사자의 비율은 남성이 더 많다.)

 

사실 나의 경우, 보통 세미나 참가 신청을 고려하는 기준은 네임드(유명 연사자)를 보고 가거나, 각 세션의 발표 주제들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지다. 허나 여성 기술 행사들은 다른 행사와 달리 내가 잘 모르는 연사자의 이야기도 기꺼이 귀 기울여 들을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는 편이고, 행사 취지 자체에 공감하기 때문에 참석하는 경우가 더 많다.

 

행사 참석의 태도가 다른 이유 (유명 연사자가 있는지 여부에 목메지 않고 행사 취지에 높은 가치를 매기며 참석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페미니즘 지향 IT 행사의 경우 스피커 참여 자격을 여성에 한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의 유명 연사자 비율이 남성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애초에 유명 연사일 확률이 낮아지는 것으로 귀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사자(스피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참석한 가운데, 예상치 못한 만족도가 나오는 부분은 바로 스피커의 콘텐츠다. 기존의 발언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방출할 기회가 딱히 없어 묵혀두었던 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마저 든다.

 

여유가 되는 시즌에 IT 세미나를 몰아서 참여하다 보면, 몇몇 유명 연사자들은 강연요청이 쇄도하기 때문인지 어쩔 수 없이 겹치는 내용들을 듣게 될 때가 있곤 하다.

 

스피커의 성비를 강제적으로 조정함으로 인해서, 기존에 기회가 닿지 못했던 사람들이 마이크를 잡을 수 있고, 덕분에 청자들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시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들을 얻을 수 있다.

 

젠더 감수성이 높은 IT 행사에서 주목을 받은 분들은 젠더를 논하지 않는 행사에서도 연단에 설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가질 수 있고, 활약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로 이어져 여러모로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We’re Just Ordinary IT People 

  • 주관처: Developer Circles: Seoul, Innovation Lab Korea의  공동주최

 

사실 글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페이스북 이노베이션랩이 스파크플러스와 태생부터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페이스북 이노베이션랩은 대한민국 스타트업 생태계 발전과 개발자의 역량강화를 위해 페이스북과 스파크랩 스파크플러스가 파트너십을 맺고 2018년 4월 판교에 오픈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파트너십이다.

 

행사와 관련된 디자인 물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들도 눈여겨 볼 수 있다.

 

오디너리 아이티 피플 행사의 포스터.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다양한 인종, 외형까지 고민한 지점들이 느껴진다.

 

 


참가자 모집

 

조금 경제적 여유가 있는 (?) 행사들이 그러하듯 핑거푸드를 제공한다고 안내가 되었다. 다만 조금 특별한 점이 눈에 띄었다. 신청 폼에 식품 알레르기와 관련된 문항을 사전 체크받고 있는 것이었는데...

설문 문항 : "특정 식재료에 알레르기가 있으신가요? 혹은 채식주의 자신가요?"

수많은 컨퍼런스와 세미나를 다녀봤지만 핑거푸드 제공 시 식품 알레르기 보유 여부나, 비건인지 등에 관련된 질문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워서 캡쳐했던 문항. 참가자로서 많은 부분들을 배려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당시 영유아 식품 알러지 관련 비즈니스를 하고 있어서 더 깊이 감명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모로 다양한 부분들을 신경 쓴 주최 측에게 칭찬의 박수를!

 


참가자 확정

설문 문항을 제출하고, 안내 메일이 왔다.

 


행사 당일 등록대

페북 이노베이션 랩과 연관된 행사이니만큼 좋아요 버튼 등이 가득 담긴 스티커도 눈에 보인다. 저 축구공 마냥 생긴 귀여운 사탕은 지정 마이크 시간에 손을 들고 발표를 하면 선물로 나누어준다.

 


행사 커리큘럼

행사는 크게 세션 발표와 지정 마이크 시간으로 나뉘었다. 

 

처음 간략하게 행사의 개요와 행사 주관처인 데브씨 서울, 장소 제공을 지원한 스파크 플러스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데브씨 서울은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었는데, 운영진들의 유쾌한 에너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 데브씨 서울이란? : DevC Seoul은 페이스북이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Developer Circles 커뮤니티의 한국 브랜치이다. Delicious devtalk, Study circle leads camp, Build day 등 1년 반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왔다. 

데브씨 운영진분들. 즐거워보인다. ㅎㅎ 데브씨 서울의 공식 포즈라고 하는데.. (!?) 공식 포즈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포즈의 뜻은 생각이 나지 않고.. 행사 마지막 저 포즈로 참가자 전체 단체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행사 메인 진행은 사진 내 가장 좌측, 유림님이 담당해주셨다.

 


행사 시간표

 

1. 개발 정글에 떨어진 고슴도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 김준영 님

 

첫 번째 연사자로 학생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분이 등장해서 조금 놀랐다. 그러나 내 생각이 이내 부끄러워질 정도로, 준영 님만이 해줄 수 있는 멋진 이야기들을 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웃고 공감하고 환호했다. 청중들이 귀를 쫑긋하게 하는 ㅎㅎㅎ 솔직하고 털털하고 유쾌한 매력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고민들을 해왔는지 이야기하였다. 준영 님의 발표는 “회복”이 주요 키워드였다.

준영님 발표 장표. 세상에.. 저 고슴도치 뭐람.. 넘 귀엽자나..

발표 슬라이드 클릭!

 

개발정글에 떨어진 고슴도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Facebook Developers Circle Seoul Women of DevC Seoul: We’re just ordinary IT people 행사 라이트닝토크자료입니다.

www.slideshare.net

 

일을 함에 있어서 회복과 관련된 이야기들. 행사를 위해서 고슴도치 스티커를 만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스티커에 관심 있는 분들은 발표 끝나고 나누어드리겠다고 이야기도 덧붙였다. (준영 님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저도 한 장만…” 이라며, 고슴도치 스티커를 냉큼 받아온 사람. 저요 저요..)

 

 

2. 평범한 페미니스트 ㅣ 비건 지향 ㅣ 퀴어 /  문예진 님 

 

비건, 퀴어 지향이라고 본인을 소개하신 예원님의 발표가 이어졌다. 예원님은 현재 콘텐츠 비즈니스 플랫폼의 서비스 기획자로 근무하고 계셨는데, 서비스 기획자로서 마주했던 이슈들에 대한 경험을 나누어주셨다. 나의 가치관과 비즈니스 플랫폼의 운영 이슈들 (민원 등) 부딪힐 때. 어떻게 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이슬람 문화권 국가 중 대학, 대학원 진학률이 높은 국가의 이야기를 하며 그러나 이분들의 경제적 활동들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행태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3. 언어의 온도 / 이진주 님

 

해당 세션을 맡고 있는 진주님은 Girls Robot의 CEO이고, 현재 제주도에 내려가서 과학과 젠더에 관련하여 다양한 실험과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걸스로봇을 몇 년간 운영하면서, 백래시가 오고 있는 상황들에서 본인이 느낀 점들. 남성이 대다수인 곳에서 젠더와 과학의 연결고리를 찾고 본인의 목소리를 내시면서 만난 상황들, 자기 자신을 방어하려 했던 과거의 태도들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STEM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지닌 여성 과학자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과학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과연 그 과학자의 스타성 문제로만 치부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걸스로봇 로고, 그리고 제주에서 활동중이신 새로운 프로젝트의 로고가 보인다.

 

 

4. Women Do It / 조은님

 

조은님은 가비아에서 일하시다가 현재 NHN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10대 청소년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청소년 성매매와 관련된 일들을 IT로 풀어보는 일을 진행하시고 있다고 이야기 해 주셨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건 인권운동가가 하는 게 아니냐”, “왜 네가 이런 것을 하냐고 묻곤 하는데, “이것도 하나의 사이드 프로젝트이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누군가 해야 할 영역이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시작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듯했다.) 닷페이스에서 청소년 성매매를 다룬 영상을 몇 년 전에 잠깐 보았었는데 끝까지 마주하기가 싫어 넘겨 왔었다고. 그러나 이번에 이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면서 끝까지 영상을 보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조은님과 같은 팀으로 프로젝트를 하고 계시는 분이 해당 프로젝트의 데이터 분석을 도와주실 분을 찾는 모습을 온라인 상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하여서 IT 업계 종사자로서 조금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모두가 주인공인 지정 마이크 시간

 

지정 마이크 시간의 규칙은 이렇다 "oo색 옷을 입은 안경을 쓰신 분이라고 지명을 하면, 마이크를 건네 받는다. 지목을 당할까 봐 동공 숨기기에 바빴던 나와 달리, 자처해서 마이크를 잡는 분들이 많아 놀랐다.

 

행사 이름에 취지에 맞춰, 보통의 사람들의 이야기,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질문들이 리스트업 되었다. ‘연봉 협상 어떻게 해야 할지’, ‘ 나의 스페셜리티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등의 질문들이 그렇다.

언젠가는 우주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고3이자 취준생이라고 밝힌 개발자. 사람들이 마음이 울렁이는 것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행사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유쾌하게 진행되었는데, 앉아만 있어도 다들 신남과 들뜸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함께 즐기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발언들을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보통 참여형 행사라고 하면 워크샵 처럼 움직여야만 하는 행사를 생각했는데, 지정 마이크 세션 덕분에 딱히 그런 동적인 액션 없이도 모두의 발표를 들을 수 있는, 모두가 주인공인 행사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슈퍼우먼이어야 하는가.

 

지정 마이크를 위한 질문들 중에는 이러한 질문들도 있었다. 

 

"우리는 꼭 슈퍼우먼 이어야 하는가? 여성인권이 높아지는 것은 좋지만 꼭 멋진 여자여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의 나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이에 대한 이야기 나눔으로 참여자 분이 마이크를 잡았다.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고 계시면서 육아를 병행하셨는데 ‘난 슈퍼맨이 아니야’ 라는 글귀를 매직으로 내복에 써서 집에서 입고 다니신 적이 있다. 어릴 적의 나로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현장에 있는 나에게도 어머니가 ‘워킹맘’으로서 느꼈을 부담감이 어머니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충격을 받았다. 페미니스트들이라 하면 뭔가 다 멋지고 다 해낼 것만 같은 뉘앙스, ‘워킹맘’은 일도 가정 생활도 어느 적정 수준 이상 해내지 못하면 질타를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데에 동감한다. (‘워킹맘’이라는 말도 2019년에 와서는 이상한 단어다. 워킹대디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다.)

 

좀 못하고, 실패하고, 상처 받으면 어떠한가. 아프면 아파하는 대로, 털어버리고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행사를 관통하는 화두 중 하나는 슈퍼우먼이 아니어도 우린 열심히 또 느긋하게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잘나야 할 필요도, 대단히 특별한 무언가 이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멋진 IT 업계의 보통 사람들을 응원한다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고민하면 또 고민하는 대로 그렇게 우리의 일상을 살아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고 멋진 일이라고 격려하는 듯했다.

 

IT 업계의 흔한 여성들을 위한 컨퍼런스.
수퍼우먼이 아니어도 우린 열심히 또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